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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으로 하는 코스튬플레이-되어보기

어린 시절부터 나는 몽상하기를 좋아했다. 수많은 몽상 속에서 내가 가장 많이 해 본 상상은 ‘되어보기’였다. 상상 속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집에서 tv를 보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수많은 누군가가 되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현실을 벗어난 세계로 생각이 전이되는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머릿속 ‘되어보기’ 상상은 내가 소유한 인형들로 인해 처음 물질화 되었다. 나의 방 안을 가득 채운 인형들로 놀이를 하며 그때마다 그들이 되어보았다. ‘인형’은 나만의 소유물이자 하나의 인격체였으며, 무한한 상상과 환상의 존재였다.

 

2015년부터 시작한 구체관절 연작은 이러한 직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이끌림에서 비롯된 작업이다. 어릴 적 ‘되어보기’ 상상은 나의 얼굴을 한 완벽한 비율의 바비인형을 매개로 늘씬한 모델이 되기도, 비만한 모습이 되기도 했다. 나의 상상이 욕망을 공유하고 나와 동일시 할 수 있는 하나의 조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근래의 ‘되어보기’ 상상은 서구의 전통적 초상화에 머물고 있다.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그려진 초상화의 일관된 화려함에 매료되었고 그들 대다수가 기품 있고 품위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수세기에 걸쳐 귀족에게 용인되는 태도와 옷차림에 대한 명확한 규칙이 도상화 되어 표현됨에 따라 초상화는 사회적 기준에 맞춰진 한정된 미장센과 절제된 연출로 그려졌다.

 

과거의 옷차림에 비해 규약과 규칙이 축소되고 심지어 의복에 대한 무질서가 질서화 된 지금, 나는 또다시 과거의 초상화 속 여인이 되어 보기로 했다. 작품을 통해서 마치 코스튬 플레이어처럼 시공간을 뛰어넘어 타인이 되어본다. 모방과 편집 과정에서 중세 여성들이 누렸던 화려함의 이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의 ‘되어보기’ 상상은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창작 재료인 ‘흙’이라는 매체를 통해 조각으로써 영구적 물질로 남아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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